프롤로그
나라를 빛낸 위인 중에 한 사람으로서 최영 장군은 중고등 학교 시절, 고려시대의 충신 중에 충신으로 배웠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라는 다소 냉철한 시각으로 보면 무조건적인 단순 충성심으로 고려가 멸망하게 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던 장군으로도 해석하기도 합니다.
고려말의 문제점
고려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명장이자 충신인 최영 장군은 일평생 오직 고려만을 생각했고 사리사욕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 시대를 살아간 백성들이나 지금의 우리나라 국민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갑자스런 공민왕 암살 후, 고려 기득권 세력 이익집단의 우두머리였던 이인임이 권력 실세로 나서면서 발생합니다.
이인임이 공민왕의 친명 정책을 버리고 친원 정책을 택하자 강력하게 반대하는 정몽주, 정도전 등 신진 성리학자들을 모두 유배를 보내고 국문을 하였는데 그 선봉에 섰던 사람이 바로 최영 장군이었습니다.
최영 장군은 이인임의 정책을 찬성했던 것도 아니었고 심성이나 인격을 존경했던 것도 아니며 심지어 무진정변을 제압할 당시 이인임을 살려주는 이해하기 힘든 행태를 보여줍니다.
물론 최영 장군도 친명보다는 친원 정책을 찬성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 이유만으로 이인임의 하수인 역할을 한 것을 전부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역사학자들은 대항마가 없기 때문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공민왕 암살 후 권력 공백기에 나타난 이인임을 대신할 마땅한 사람이나 세력이 없으니 고려만을 생각한 최영 장군은 싫어도 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려왕조를 개혁하고 발전시킬 신진 성리학자들을 모두 탄압하여 귀향 보내고 어린 우왕을 허수아비로 내세운 이인임은 탐욕의 권신들과 함께 정권 말기 온갖 부패의 온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군사력을 보유한 최영 장군이 있는 한 아무도 이들을 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최영 장군의 실수
최영 장군은 이러한 이인임을 비난하고 질책하고 망해가는 고려를 크게 걱정하면서도 그 이외의 어떠한 새로운 생각이나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신진 성리학자들의 가치와 의미를 벌써부터 깨닫고 그들과 함께 협력하여 조선을 건국을 실행해 나갔던 이성계와는 너무도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이인임의 탐욕과 소인배 근성을 파악했다면, 정말 고려가 걱정이 되었다면 젊은 신진 성리학들의 얘기를 한 번쯤 들어 보던가, 정적인 이성계가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추진하는지 동태라도 잘 살피고 벤치마킹이라도 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최영 장군의 실수라 하기에는 너무도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마침내 고려 최고 충신이자 명장이었던 최영 장군이 고려가 망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고 본인도 위화도 회군 후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시사점
제대로 된 방향성 없이는 어떠한 큰 힘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충성심도 무의미하다는 아니 오히려 큰 해가 될 수 있다는 의미 심장한 시사점이 있는 역사적 사실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