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베트남 하노이에 위치한 호찌민 묘소에는 평일에도 수백 미터씩 줄을 선 참배객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 번 글에서는 베트남 최고의 영웅, 호찌민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호찌민을 존경하는가?
호찌민은 베트남의 민족 지도자이면서 독립 운동가였지만 다양한 전략과 전술로 강대국들을 이겨낸 창의적인 전술가, 전략가로도 얘기되기도 합니다.
적들이 예측하지 못한 불시 공격이나 게릴라 식 전투를 활용하여 불리했던 많은 독립전쟁들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던 호찌민은 1911년부터 프랑스, 영국 등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밑바닥 생활을 하지만 민족주의 역사의식을 확립하고 공산당 활동과 베트남 독립운동을 하게 됩니다.
30년 만에 베트남에 돌아온 그는 월맹을 결성하여 본격적인 프랑스에 대항해 독립투쟁을 펼칩니다. 그는 철천지원수였던 프랑스와 협상을 맺을 정도로 전략적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2차 세계대전 중 잠시 프랑스를 대신해서 베트남을 점령했던 일본이 패망하자 베트남 북부를 중국군이, 남부를 영국군이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호찌민은 중국이 더 위험한 존재라고 판단하고 프랑스와 협상하여 프랑스 군대를 다시 베트남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가장 오래된 베트남 약탈자이며 증오의 대상인 프랑스가 베트남을 재점령하는 것에 대해 참모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호찌민은 대원칙을 지키면서도 상황에 따라 대응방법을 바꿔야 한다고 설득하면서 강행하였고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되었습니다.
호찌민이 공산주의를 선택한 것도 독립운동을 위한 세력 확보와 구소련의 레닌이 유일하게 제3세계 식민지의 독립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었다는 의견들도 그래서 더욱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호찌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구소련과 중국의 간섭으로 인해 우리나라처럼 남북으로 분할되었으며 결국 남북 간 전쟁인 베트남 전쟁에 휘말렸지만 하나의 대원칙과 큰 목표 하에서의 다양하고 유연한 그의 전략은 세계열강들이 호심탐탐 노리는 베트남을 지켜낼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호찌민이 베트남 국민들로부터 추앙받는 것은 비단 이러한 그의 전략 때문만은 아닙니다.
호찌민은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개인적인 삶은 포기하다시피 살았습니다. 가족이 생기면 욕심도 생긴다고 결혼도 하지 않았으며 형제자매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국민들이 고생하는데 호화롭게 살 수 없다며 주석궁이 아닌 옆에 있는 정원사의 집에서 살았으며 반찬이 세 개를 넘으면 요리사는 크게 혼이 날 정도였습니다.
1969년 9월 2일에 완전한 독립을 보지 못하고 심장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는 서민들의 옷만을 입었고 자신을 어떠한 특별 예우도 금지하였습니다.
그는 유언장에 전쟁 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세부 내용과 전사자들에 대한 예우를 상세하게 적었으며 본인의 장례는 절대로 치르지 말고 화장해 달라고 적었습니다.
시사점
이처럼 호찌민은 베트남의 독립이라는 불변의 대원칙만을 위해서 원수 같은 프랑스와도 손을 잡는 등의 다양하고 유연한 방법을 선택하였지만 정작 본인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이것을 아는 베트남 국민들은 오늘도 줄을 서서 그의 묘소를 참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강의 틈새에 껴있는 비슷한 지정학적 위치의 우리나라 최근 정치 상황을 보면 참으로 부럽고 아쉬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번영과 안위라는 대원칙만을 지향하고 몸소 실천하는, 유연한 전략을 소유한 큰 정치인이 하루빨리 한반도에도 나타나기를 기원합니다.